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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 보기   날짜 : 2007/02/28  조회수 : 2285  
 (임춘원) :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등불

임춘원(林春元) - 국회의원


온 세상이 생기가 도는 봄이 되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나는 등산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분이 장준하 선생이다.
그렇게 좋아하시고 자주 오르시던 산에서 믿기 어려운 의문의 죽음을 당하시어 세상을 떠나신 것이 벌써 20년이나 흘러갔다. 나는 선생을 회상해 보고 있자니 불현듯 선생의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잔잔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분단 조국을 놓아두고 떠나신 선생이 한없이 야속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진정한 민족주의자요, 민주주의자였던 선생의 그 고결한 인격, 맑은 기상, 곧은 지조와 함께 선생께서 보여주셨던 뜨거운 민족애는 영원히 내 가슴에 영롱하게 새겨져 있다.
선생이 그렇게 허망하기 떠나신 후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세상에 남아서 못난 짓하며, 세월 보내느라 선생님 뵈올 면목이 없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민주, 그리고 통일 이외는 생각도 하지 말라시던 선생은 이 땅에 없고, 미련하고 한심한 사람들이 남아서 선생의 뜻을 더럽히지나 않는지 심히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을 보고 다시 뛰자. '열심히 뛰면 선생이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한 평생을 개인의 영달과 안락한 삶을 외면한 채 오로지 분단조국의 통일과 함께 군가정권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민주주의를 이 땅에 소생시키고자 일생을 민족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삶이 나에게 준 가르침과 교훈은 참으로 엄청나다.
나는 선생을 1960년대 상아탑학원을 운영할 때 만났다. 물론 『思想界』에 몰두해 계실 때이므로 선생은 항상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선생이 원고 때문에 함석헌, 천관우, 신상초씨 등 수많은 분들과 만나면서 토론하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늘 '왜 저렇게 어려운 일을 맡아서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는 선생의 참뜻을 진정 알 수가 없었지만 선생께서 가신 지 20여 년이 지난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 어리석음에 내 자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선생은 감옥에 계시고, 부인 김희숙여사가 나서서 오직 성경책 한 권을 믿음으로 삼아 선거운동을 한 끝에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던 강상욱씨를 낙선시키고, 옥중 당선시키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때 여자의 힘과 신앙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군사정권의 강압통치가 날로 더해가던 1970년대 초반에 지금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신문회관 강당에서 백기완 선생과 김지하 시인이 장선생을 옆에 앉혀놓고, 마구 비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장선생은 그 이후 그분들에게 참으로 가깝게 그리고 진실하게 대하시던 모습을 나는 지금 또 생각한다.
내가 늘 존경했던 선생께서는 언제나 가난했다. 나는 선생이 새로 이사를 가셨다기에 찾아가 보면 어김없이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고, 가장 허름한 집이었다. 좀 괜찮다 싶은 집이라 생각이 들면 선생이 기거하기는 집, 지붕 바로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는 참으로 아찔한 분위기였다. 언젠가 제기동으로 이사를 하셨기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고압선이 지나가 바로 밑에 있는 집이 월세가 싸기 때문에 이사 오셨다며, 사시던 그 집에서 한겨울에도 방에 연탄도 때지 않고, 추운 냉방에서 가구목을 밑에 깔고 그 위에 화이바 판을 깔고 지내시면서, 지금 감옥에서 우리 동지들이 고생하는데, 어찌 우리만 따뜻한 방에서 편히 잘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때 나는 선생이 뜨거운 민족애와 동지애를 진정으로 느낄 수가 있었으며 진실로 한없는 경의와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이 국회의원 시절, 의원회관이 대한극장 맞은편 신성상가 위에 있었다. 그때 아마, 선생의 사무실은 836호실인가(?)였는데, 당시 그 사무실의 주역은 지금 이부영의원의 부인이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항상 모든 일을 이부영의원의 부인이 도맡아 하시던 그 사무실의 모습이 언제나 분주하여 항상 바쁘게 움직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이부영의원의 사무실 운영은 그 때 당시처럼 부인께서 철저히 잘 하실 거라고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그 때 이후 '훌륭한 여성상' 그러면 우선 장준하 선생의 사모님과 이부영의원의 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기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며,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늘 자기 남편을 존경하고, 그 견디기 어려운 고생을 보람으로 바꾸어 놓으며, 주위에 많은 동지들에게 편안하고, 믿음을 주는 자세는 이 세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가 드물다고 생각한다. 특히, 장준하 선생의 사모님 김희숙여사의 어려운 살림 꾸려가시던 모습은 우리 나라의 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될 것이다.
어느 날이던가, 하루는 집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갑자기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신 선생은 갑자기 사모님에게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모님은 집에 찬거리가 없었던 듯 했다. 그러나, 갑자기 깻잎을 가져다 요리를 해 밥상을 차려 오셨는데, 고기나 생선은 전혀 없었으나, 식물성으로만 차려주신 밥상이 나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때 장선생님은 나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셔야 할 때이므로, 나에게 좀 잘해 주시려고 집에까지 데리고 가셨던 모양인데 아무 것도 없는 집에 나를 데려다가 무슨 대접을 하시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사모님을 믿으셨다. 그렇게 믿고 신뢰하시던 선생과 사모님 관계를 보면서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배운 것이다.
지금 광화문 교보빌딩 뒤에 개천이 있었다. 삼청동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 개천이 되어 광화문으로 흘러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광화문 네거리, 지금 교보빌딩 바로 뒤편에 빈대떡집이 있었다. 평안도 출신 아주머니가 이쁘장하게 생기셨는데 언제나 손님이 아주 많았다. 특히 기자들이 많이 다녔는데 아마 바로 앞에 동아일보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허름한 빈대떡집에 저녁에 가보면,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아주 싫어하던 사람들은 거의 들르는 집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나를 데리고 그 집에 자주 다녔다. 하루는 검정 양복을 입으시고 그 집에 가서 저녁을 빨리 먹고 난 후, 밤 9시부터 어느 모임에 가서 연설을 해야 하는데, 그만 백기완 선생과 김지하시인이 와서 토론을 하다가, 된장찌개가 그 검정 양복에 엎어지고 말았다. 우리 일행은 큰일이 난 것이다. 9시에 연설을 해야 하고, 양복은 단벌신사이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세탁소에 가서 다른 양복을 빌려 입고 그 연설장에 나타날 수가 있었다.
당시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 함께 고생했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떠오르며 지금도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던 빈대떡집에서 밤새워 토론하던 모습이 확연하다. 그러나, 선생과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은 참담했던 유신시절에 우리가 치러야 했던 값진 경험들이었다.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선생님 때문이다. 당시 나는 상아탑학원을 종로에서 잘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수가 8,000명이 넘었고, 강사수가 250명이 넘는 대학교와 같은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그때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당시 매월 순 이익이 8,000만원 이상이었으니, 그때 은행예금 순위가 전국 1위를 할 정오로 학원이 잘 운영될 때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이 당시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을 하겠노라고 하시며 『思想界』에 심취되어 어려운 시절 돈을 빌려준 것이 보증수표를 드려서 그것이 그만 내가 박정희 정권에 당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선생이 종이 값을 주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그 종이 장사에게 준 수표가 나를 정치마당에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는 도망 다녀야 했고, 결국에는 감옥에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집사람은 그때부터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 서슬퍼런 유신시절에 나는 9번을 감옥에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처절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는 8월이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인다. 8월에는 광복절이 있고 선생께서는 조국 광복이 있던 8월달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험준한 약사골 한켠에서 비통하게 떠나셨다.
선생이 떠나시던 그 날, 선생은 아침에 나를 집으로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몹시 더웠다. 부채도 잘 부치지 않는 선생의 사모님은 이상한 선풍기를 갖다 놓고 돌렸는데,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마저 나서 더 더운 것 같았다. 선생은 나에게 손을 펴보이면서 엊그제 망우리 산소를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손바닥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펴 보이셨다. 그런데 그 며칠 뒷날, 선생께서 등산을 하다가 실족하여 산에서 떨어질 때 소나무를 붙잡아서 손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는 왜곡된 언론보도를 보고, 나는 그들의 허무맹랑한 보도에 항의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가서 일주일동안 남대문 경찰서에 갇혀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날 아침에 선생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름 전이라고 하시던가, 아니면 20여일 전이라고 하셨던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던 독립과 관련된 태극기나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보든 것들을 이화여자대학교에 다 주셨다고 했다. 또 천주교에 입교했다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렇게도 기독교 신앙에 빠져 계시던 분이 왜 천주교에 입교하시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왜, 생전에 자신이 귀하게 간직하던 중요한 것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시기 며칠 전에 모두 학교에 기증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셨는지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하여튼 나는 장준하 선생으로 인해서 정치를 알았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 사람이다. 또 그분을 따라서 활동하다가 9번이나 감옥에 갔었던 사람인데 왜 남다른 감회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보다는 그 많은 고생을 하고 어려운 역경을 겪었으면서도 아직도 재야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혹 내 자신이 잘못해서 선생의 명예에 흠이 될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무엇보다도 장선생님을 좋아하시고 함께 뛰셨던 함석헌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천관우 주필, 신상초 선생 등 서로 존경하시던 분과 서로 거북하게 생각하시던 선생들이 이제는 저 세상에서 우리들을 보시고 무슨 말씀들을 하실런지 우리는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선생께서 나에게 주셨던 가르침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며 등불이 될 것이다. 앞으로 장준하 선생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면서 삼가 선생님 앞에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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