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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왕복 10km를 달려... 국경 초월한 자전거 형제애['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 ⑥]

▲  중국 중앙군 남양전구사령부인 현재 남양경제무역학교


왕복 10km를 달려... 국경 초월한 자전거 형제애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 ⑥] 린취안에서 난양까지


1944년 11월 30일 오후 1시 김학규와 함께 남아서 공작대 임무를 수행할 13명의 동지의 전송을 받으며 6명의 여인과 3명의 아이를 포함한 53명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속에 중경을 향해 린취안을 떠났다. 약간의 식량과 용돈을 갖고 겨울옷도 아닌 여름용 중국군복을 입고 그들은 한파를 뚫고 걸어야 했다.

문제는 이들이 가는 길에 베이핑(北平)과 한커우(漢口)를 연결하는 남북으로 가로지른 평한선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군에 식량을 공급하는 작전상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 철도를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 못 미쳐 있는 한 마을에 당도했을 때 다행히도 이 마을에는 중국 정규군 1개 사단의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군과 중국군의 암묵적인 타협으로 이들은 일본군의 묵인 아래 철도를 건너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것이 있으리라. 적군과의 타협이라! 후퇴하는 중에도 중국군은 사단장의 가족들과 처첩들을 가마에 태우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상태를 갖고 있으니 일본군에게 안 쫓길 수 있나. 이들 중국군에 섞여 장준하 일행은 평한선을 넘었다. 이때의 긴박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의 직감으로 철도 근방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앞서 가던 부대가 별안간에 구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들이 별안간 뜀박질로 내달리는 것일까. 상황인 급박해진 것인가, 일군에게 발견된 것인가. 우리도 무의식 속에 구보를 시작했고 무슨 힘에 끌려가는 듯 뛰어 갔다. (중략)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앞사람의 뒤만을 따라 달렸다. 구보는 철도를 넘어서도 멎지를 아니했다. 숨이 턱밑에 걸려서 헐떡였지만, 그 뜀박질의 대열에서 혼자 미끄러지기는 싫었다. 아마 안전지대까지 내리 50여리를 뛰는 듯싶었다."

자전거 가게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부러진 핸들바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일부는 먼저 떠나고 두 사람만 남아 교체한 후 따라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늦게 출발하더라도 함께 가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호텔의 도움으로 좀 떨어진 곳에 자전거 가게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보통 가게 문은 9시가 넘어야 연다고 했다.

호텔에서 알려준 곳으로 찾아 갔으나 자전거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자전거 가게가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찾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헤매고 있는데 한 사람이 안내해 주겠다고 전기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우리가 찾을 때는 안 보이던 자전거 가게가 골목 안에 있었다. 상호가 TRIACE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트리에이스 자전거 대리점인 듯했다. 아주 젊은 사람이 막 문을 열고 가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중 알아보니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자전거 복장 차림의 외국인들의 등장에 그는 당황한 듯 보였고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데 연결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가게 안을 살펴보니 거의 완제품 자전거만 파는 것 같았다. 전시된 부품이 별로 없었고 우리가 찾고 있는 핸들바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한 구석에 쓰다 버린듯한 핸들바가 하나 놓여있어 자전거에 대 보았으나 문제는 핸들바와 자전거 차체를 연결해 주는 스템과 규격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전시된 스템은 아예 없었다. 완성된 자전거에서 빼 달라고 할까 했으나 그 학생에게 근처 가게를 물어 보아 다시 가보자고 했다.

마침내 핸들바를 바꾸다

그때 마침 건장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데 가게를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는지 오토바이 의자 안에서 스템을 꺼낸다. 바로 그 구석에 있던 핸들바에 맞는 스템이었다. 우리는 반가움에 스스로 핸들바를 해체하고 그 핸들바와 스템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비로소 안심했다. 핸들바가 그나마 대도시를 앞두고 부러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후 한 여자 분이 도착했는데 그 분이 주인이라고 한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방문해 준 것이 매우 반가운 듯했다. 비록 쓰던 것이었지만 그들은 값을 받지 않았다. 그냥 준 것이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국적을 초월한 형제애가 느껴졌다. 그들의 가게를 배경으로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아마도 홍보용으로 이 사진을 걸어둘 것이다.

한숨 돌리고 나니 배가 고팠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우리는 굶고 있었다. 대리점 주인은 핸들바를 거저 준 것도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를 근처 만두가게로 안내했고 도시 출구까지도 안내해 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그도 자전거를 타고 함께 갔다.

그는 만두가게에서 우리가 아침을 먹는 동안 함께 있어 주고 난양으로 가는 333번 성도 입구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길은 공사 중이라 우회를 해야 했기에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난양으로 나가는 도로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5km나 와 주었으니 왕복 10km를 달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한 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결국 10시에 출발한 우리는 130km나 떨어진 난양(南陽)시 셔치(社旗)현 입구에 오후 7시가 돼서야 도착했다. 이정표도 거의 없었다. 평지만 계속 보고 오던 우리에게 비로소 작은 언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염소떼가 자주 나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시내까지가 또 한참이었다. 호텔 찾기가 어려워 마침 옆에 서 있던 오토바이 탄 남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를 호텔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8시였다. 이상하게 이 호텔은 아예 여권을 받지 않았다. 외국인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보였다. 다음 날 외국인이 온 것이 신기했는지 호텔 여직원들이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다.

불편한 잠자리에 이가 득실, 옴에 옮아 엄청 고생

12월 1일 중국군과 헤어지고 일행은 4개 조로 나뉘어서 조별로 이동했다. 걸음이 빠른 조가 먼저 도착해 잠자리를 미리 마련하고 저녁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하루에 평균 100여 리를 걸었다. 중국군 군복을 입은 이들은 도착한 마을에서 잠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길을 잘못 길을 들어 산으로 들어갔고 그 산에 있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성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적이었다. 그들에게 모든 짐과 식량을 빼앗길 뻔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다음 날 성문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배고픔이었겠지만 잠자리의 불편함도 이에 못지않았다. 형편없는 잠자리로 매일같이 이와의 전쟁을 벌였으며 많은 동지들이 옴에 걸려 고생을 엄청 했다. 이들의 불편한 잠자리를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겨우 바람막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광 같은 방으로 분산되었다. 맨바닥에 나뭇가지를 꺽어다 놓고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맨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버리기도 하며 돼지, 소가 있는 헛간 한구석에서 잘 정도까지도 되었다. 등잔불 밑에서 우리는 전신에 가려운 몸을 뒤틀며 이 사냥을 벌였다. 어두컴컴한 등잔 밑에서나마 옴에 걸려 고생한 몇 동지들은 돼지기름에 유황을 끓인 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을 홀랑 벗고 전신에 문지르고 있는 광경은 진기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일행은 난양 교외에 있는 중앙군 전구사령부에 도착했다. 여기서 2주일을 머문 후 중국군 장교로서 보급품을 지원 받았다. 이들은 난양을 떠나 사흘 만인 12월 20일에  광복군의 전방 파견대가 있는 라오허커우에 도착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이 정도는 돼야지

오늘은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가장 마음이 편한 날이다. 오늘 주행할 거리가 50여km 정도이기 때문이다. 날씨도 화창했다. 9시에 출발했음에도 난양에 도착하니 2시가 채 안 되었다. 난양까지는 10km가 넘는 곧고 넓은 길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있었다. 난양에 들어서니 자전거 도로의 표준인 양 널찍한 자전거 도로가 완전히 한 차선을 차지하고 있다.

난양은 인구가 천만 명을 웃도는 큰 도시이다. 장준하 일행은 난양 교외에 있는 중앙군 전구사령부에 도착하여 중국군 장교로서 보급품을 지원 받았다. 이 사령부가 현재 남양경제무역학교(南陽經濟貿易學校)이다. 골목 안쪽에 있어 쉽게 찾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으나 큰 길을 가다 보니 강을 건너기 전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난양과 떨어진 곳이었겠으나 지금은 시내나 다름없이 보였다.

이제 600여km를 왔으니 여정의 반은 완수한 셈이다. 가능하면 내일 갈 거리를 줄이기 위해 라오허커우 방향에 있는 시내 외곽의 호텔을 잡았다. 거의 매일 저녁 늦게 호텔에 도착해 충분히 쉴 시간이 없었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반나절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거리를 산책하기도 하고 잠도 자면서 그동안의 피곤함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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