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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단 귀국 앞두고 베이징 관광

# 이모저모

 

 

# 장정단 귀국 앞두고 베이징 관광

제6차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장정단이 귀국을 하루 앞둔 26일 베이징[北京, 북경] 관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정단은 이날 오전 만리장성, 천안문 광장, 자금성을 단체로 관람한 뒤 오후 5시쯤부터는 개인적으로 북경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장정단은 27일 낮 12시20분발 베이징발 아시아나 항공 332편으로 중국을 떠나 인천국제공항에 오후 3시20분 도착할 예정이다. 장정단은 한국 도착 즉시 경기도 광탄리 장준하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공식 해산한다.

 

 

# 이모저모

●…25일 한단[旱單, 한단] 과 태항산 전적지를 방문한 장정단은 버스로 5시간 가량 달려 26일 새벽 1시쯤 베이징 캐피탈 호텔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장정대원은 술과 이야기로 밤을 꼬박 새우는 강행군. 결국 26일 일정은 예정되었던 오전 8시보다 1시간이 훨씬 더 지나서 시작. 김애경 대원과 김주연 대원은 같은 방에서 늦잠을 자다 오전 9시가 넘어 모든 장정대원이 버스에 오른 뒤에야 '황망한 표정'으로 나타나기도. 이들은 "너무 정신이 없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도 못 찾을 지경이었다"고 토로.

장정단원들이 26일 밤 베이징 시내 왕부정로의 선물 가게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이날 점심식사로는 베이징에서 유명한 북경오리를 먹었는데, 전채와 간 튀김 등을 너무 많이 먹은 대원들은 정작 밀전병에 싸먹는 본 요리는 배가 너무 불러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일부 대원들은 밤에 먹는다며 남은 음식을 1회용 도시락 용기에 정성껏 포장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이날 낮 자금성 관광이 늦어지는 바람에 개인적으로 베이징 시내 관광을 계획했던 장정단원들이 잠시 혼동을 겪기도. 늦어도 오후 4시쯤에는 끝날 것으로 생각됐던 자금성 관광은 오전 일정이 밀리면서 4시30분이 훨씬 넘어서 종료. 일부 대원들은 중국역사박물관, 북경대학 등을 찾아볼 예정이었지만 대부분 포기하는 모습.

●…개별적인 관광 시간에 장정단원들은 베이징 시내 야경을 즐기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바쁜 표정들. 또 "중국에 있는 동안만큼은 패스트 푸드나 한국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이준영 사무국장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원들은 베이징 시내의 맥도널드나 KFC 등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즐기기도.

# 귀국 이후

1945년 11월 23일 장준하는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한다. 그러나 조선 땅은 일본군이 나간 대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이 한국분할점령방안을 공표(1945..9.2)해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귀국 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와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으로 일한다.

1947년에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참가하여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을 맡았다. 조선민족청년단은 민족 정신의 전통을 계승하여 새 나라의 역군으로 청년들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됐다. 1949년 장준하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해 같은해 6월 졸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시 장준하는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국민사상연구원 기획·서무과장, 사무국장을 맡았다.

1952년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으로 피난수도 부산에서 3번째 월간지 '사상'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재정 문제로 4호까지 발간하고 중단되었다. 1953년 장준하는 국민사상연구원을 사직하고 새로운 잡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사상계』는 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마감하고, 서울로 옮겨 발간됐다. 1958년 장준하는 『사상계』에 쓴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연행되었지만, 국민들의 눈초리에 두려웠던 이승만 정권은 결국 장준하와 함석헌을 풀어주었다. 그후 이사보안법파동(야당과 언론탄압을 위한 수단으로 신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도모하려던 정치적 사건)에 대항해 『사상계』에 백지 권두언을 실어 자유당 정권을 정면에서 비판했다. 『사상계』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역시 앞장서서 규탄했다.

장준하는 4·19혁명 이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 홍보분과의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 선생과 함께 이를 비판했다. 장준하는 『사상계』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장준하는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시작한다. 그는 그 해 『사상계』 긴급증간호 4월호를 발행하여 박정희 정권의 매국외교를 규탄하고 7월호 『사상계』 긴급증간호를 발행하여 한.일 협정 조인을 반대하였다. 1966년에는 민주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폭로 및 규탄대회에서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왕초"라고 비판해 국가원수모독죄로 석달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이를 시작으로 장준하는 모두 37번 구속되고, 그 가운데 9번은 철창에 갇힌다.

그러나 1967년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옥중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다. 7월부터 국회의원으로 4년의 임기가 시작되었고 11월에는 국회에 출석하여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 1월1일 『사상계』의 발행인직을 부완혁에게 위임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선포한다. 장준하는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백만시민 서명운동을 주도하며 박정희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1974년1월 구속되어 징역 15년과 자격 정지15년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1974년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장준하는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