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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기 장정 대원들, '청년등불 6기'로 거듭나다, 충칭 임정 청사 앞에서 1944년 장준하 일행 환영행사 재현, 충칭 일대 임정 관련 유적 방문 뒤 시안 이동, '한·중 우호의 밤' 행사

# 점점 사라지는 충칭의 임시정부 관련 유적들

# 이모저모

 

 

# 6기 장정 대원들, '청년 등불 6기'로 거듭나다, 충칭 임정 청사 앞에서 1944년 장준하 일행 환영행사 재현, 충칭 일대 임정 관련 유적 방문 뒤 시안 이동, '한·중 우호의 밤' 행사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청년등불이 된 6차 장정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지난 17일 구국장정 6천리 길에 올랐던 제6차 장정단 54명이 23일 충칭[重慶, 중경] 임시정부청사 돌계단에서 청년등불 6기로 거듭났다.

이날 오전 8시 40분쯤 임시정부청사에 도착한 장정단은 1944년 1월 31일 장준하 일행이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충칭에 도착했을 당시 임시정부 요원들이 환영 의식을 재현하며 청년등불로 공식 명명됐다.

김호준 단장은 "여러분들은 이제 김구의 후예, 장준하의 후예"라며 "등불이 제 몸을 불살라 불을 밝히듯 서로 서로 힘을 합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더 밝게 빛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장정단은 애국가와 독립군가를 힘차게 부른 뒤 윤경로 교수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했다.

임시정부청사 행사를 마친 등불 6기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탈고한 인근의 충칭 3차 임시정부 유적과 광복군 총사령부(現 미원 식당), 장준하 선생 등 임정 관계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토교촌 등을 방문했다.

등불 6기는 이날 오후 중국 서북항공 WH2522편으로 시안[西安, 서안]으로 이동해 섬서청년관리간부학원 교직원 및 학생들과 '한·중 우호의 밤' 행사를 가졌다. 양국 학생들은 식사와 함께 장기 자랑 등을 하며 친선을 다졌다.

중국섬서청년관리간부학원 원장은 "앞으로 중국과 한국은 무역 거래는 물론 각종 교류가 증대될 것"이라며 "이 행사를 통해 양국 청년들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 달성에 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환영했다.

김호준 단장은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그리고 앞으로 1000년 뒤에도 함께 만나기를 소망한다"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이웃을 둔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등불 6기는 24일 시안의 장준하 유적과 진시황릉 등을 답사한 뒤 열차 편으로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한단[旱單, 한단]으로 이동한다.

 

 

# 점점 사라지는 충칭의 임시정부 관련 유적들

현재는 미원이라는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였던 건물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충칭의 임정 관련 유적들이 제4차 임시정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멸 위기에 처했다.

현재 임정 당시 회의실과 집무실 등이 복원되고 각종 관련 유물 자료 전시실이 마련된 건물은 충칭 4차 임정 건물. 이 건물에서 도보로 10여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충칭 3차 임시정부 건물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탈고한 곳이지만 표지석만 세워져 있을 뿐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충칭의 또 다른 임시정부 관련 유적인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현재 '미원'이란 이름의 식당으로 올해 안에 재개발이 될 예정이다.

장준하 선생 등 임시정부 관련 인사들의 집단 거주촌인 '토교촌'은 재개발이 이미 시작되어 단 하나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헐린 상태이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야 했지만 매년 두 차례씩 이곳을 방문하는 장준하 기념사업회 구국장정 6000리 행사를 눈여겨본 충칭시 정부가 일시 보류를 했다. 충칭시 정부는 최근 한국 정부에 이 건물의 보존 가치를 문의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다.

기념사업회 이준영 사무국장은 "보존이 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비용 문제나 역사적 가치, 보존되었을 때 활용 방안 등 여러 난관이 있다"며 "임시정부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충칭의 관련 유적들이 하나둘 소멸할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 이모저모

●…23일 오전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환영 의식 재현에서 윤경로 교수는 '조국 독립' '민족 통일' '청년 등불' 세가지를 선창하며 만세 삼창. 등불 6기는 환영 의식 뒤 임정 청사 곳곳을 둘러보며 임정의 자취를 느꼈다. 특히 임정 청사 전시실에는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거사 전 두 아들에게 유언이 걸려 있어 등불 6기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윤 의사는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 드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고 의연한 결의를 다졌다.

●…장준하 선생 등 임시정부 인사들의 집단 거주지인 토교촌은 2차선 포장 도로에서 폭 2m 가량의 비포장 비탈길을 5분여 가량 걸어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포장 비탈길은 곳곳에 텃밭이 있었는데 인분과 음식물 찌꺼기로 만든 비료를 주어서 등불 대원들이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다. 토교촌에 유일하게 남은 한 채의 건물도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건물 앞쪽 비탈에 쌓은 벽돌 담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 등불 대원들은 토교촌과 충칭 임정 요원들의 당시 생활상을 설명들으면서도 담에서 한발자국 떨어셔 서야했다.

●…라오허커우[老河口, 노하구]에서 운동화를 60위안 주고 구입한 K(취재에 협조한 본인의 요구에 따라 실명을 싣지 않습니다) 대원은 23일까지 나흘 동안 양쪽을 거꾸로 신고 다니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K대원은 지난 20일 라오허커우 이종인부대 역사관 관람 때 가죽 구두가 망가져 중국산 운동화를 구입했었다. K대원은 이날 오후 충칭 공한중 우호의 밤 행사의 마지막에 중국과 한국의 청년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항 탑승구 앞에서 줄을 서 있다가 한은정 간호사가 "너 왜 신발을 거꾸로 신고 있냐"는 말에 처음으로 자신이 신발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 신고 있었던 사실을 발견했다. K대원은 신발을 제대로 고쳐 신다가 씹고 있던 껌까지 운동화에 떨어뜨리는 등 매우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K대원을 지켜보던 한 대원은 "이 운동화는 왼쪽과 오른쪽이 잘 구별이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며 "그렇지만 많이 불편했을텐데 어떻게 모르고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한마디.

●…시안에서 열린 한중 우호의 밤 행사는 시종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 양국이 번갈아 가며 진행한 장기 자랑은 모두 합해 20여개에 달했다. 중국 측은 10대 초반의 예술무용단을 동원해 전통 무용을 선보이고, 대학생들의 멋진 춤과 노래 실력을 발휘했다. 등불 6기는 이은영 등 5명의 '젊은 그대' 음악에 맞춘 응원 율동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차량 장정 4조가 핑클의 '영원한 사랑'에 맞춘 남자 대원들의 '엽기적인 율동'으로 분위기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양국 청년들은 김인혜 대원의 꽹과리 반주에 맞춰 만찬장을 돌며 우의를 다지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임시정부청사의 환영행사

# 충칭의 장준하 일행

# 토교촌에서의 생활

 

 

# 임시정부청사의 환영행사

장준하 일행은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앞뜰에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인 이청천 장군 등 임정 요인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장준하는 김구의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직 사진 한번 본 일조차 없었지만, 거구의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우리 임시정부의 주석이신 것을 어떤 영감 같은 느낌이, 확신까지 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직까지 우리가 알기로는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의 배후조종인으로서 무서운 정략, 지략의 인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검소한 인품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분이 바로 이분일까. 엷은 미소를 담은 선생의 인상은, 검은 안경속에 정중한 성격을 풍기는 아주 인자한 인상이었다. 깊은 침착과 높은 기개와 투박할 정도의 검소함을 표정에 숨기고 나와서 김구선생은 좌우로 오인일행을 거느리고 우리들 앞에 나오셔 섰다. 장엄한 여식의 주악이 울리듯, 파도 같은 바람의 주악이, 분명히 우리들 가슴마다 물결을 일으키며 울려 퍼졌다. 이분을 찾아 6천리. 7개월의 행군의 귀항처럼 우리는 애국가를 듣고 싶었다." (돌베개 p.238-239)

환영식 뒤 임정 청사에서 임정의 각료와 기타 직원들 약 오십여명 그리고 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들까지도 한자리에 모여 장준하 일행을 환영하는 모임이 베풀어졌다. 김구 주석의 환영사에 이어 장준하의 답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답사는 끝을 맺지 못하였다. 김구선생의 울음을 신호로 장내는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리고, 음식이 들어왔지만 손을 대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통곡만 있었을 뿐, 몇 시간 후 하나둘씩 처소로 돌아가고 환영회는 끝나고 말았다.

 

 

# 충칭의 장준하 일행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도 장준하 일행을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환영회석상에 차린 음식들은 임정환영회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의 훌륭한 음식이었지만, 이청천 사령관의 말끝에 다시 울음바다가 되어 일행은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 이곳저곳에서 초대하는 환영회가 경쟁적으로 많았고, 이를 통해 장준하 일행은 임정이 각 정당의 파당 싸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준하는 임정의 파당 싸움을 보다 못하고 교포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러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해서, 아니 그 여념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해서 몇 번의 사경을 넘고 수 천리를 걸어 기어이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요즘 이곳을 하루 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 폭력을 지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분명히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돌베개 p. 255-256)

이 후 장준하와 그 주변동지에게는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지만 중경의 정치풍토는 갈수록 가관이 되어갔다. 당의 조직경비조달책으로 댄스파티까지 여는 모습에 장준하는 댄스 파티장에 몽둥이와 화약물을 가지고 들어가 위협하여 댄스 파티가 다시 열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나 항의와 규탄연설 때로는 폭력을 써봤어도 어느 것 하나 근본적으로 낙관할 수 있는 바탕을 보이지 않았다.

 

 

# 토교촌에서의 생활

장준하 일행은 결국 충칭 도착 20일 만에 충칭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토교(土橋)라는 부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토교촌은 임시정부가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15년 기한으로 5천원을 내고 2천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교포들 100여명을 살게 한 곳이다. (백범일지 하권 p.341 참조)

장준하 일행은 토교촌의 '한교기독청년회관'에서 『등불』을 계속간행하고, 강사를 초빙하여 혁명운동사를 배우고, 체력단련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1945년 3월 하순 김구 주석의 소개로 외국인 덱커씨와「타임」지의 기자를 만나 <세계기독교년차대회>에 제출할 <제2차대전 이후의 한국기독교 실태보고서>를 전달하였고, 그때 나눈 이야기가 타임지에 기사로 보도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