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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단 OSS 훈련장 방문, 구국장정 6천리 답사 모두 끝내, 야간 열차편으로 허베이성 한단시행, 25일 태항산 격전지 방문

# 이모저모

 

 

# 장정단 OSS 훈련장 방문, 구국장정 6천리 답사 모두 끝내, 야간 열차편으로 허베이성 한단시행, 25일 태항산 격전지 방문

OSS 훈련장에 도착한 청년등불 6기가 장준하의 훈련을 생각하며 구보를 하고 있다.청년등불 6기가 24일 시안[西安, 서안] 두곡진의 광복군 제2지대 OSS 훈련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장준하의 궤적을 따라가는 6천리 답사를 마쳤다.

청년등불 6기는 쉬저우[徐州, 서주] 의 쓰카다 부대부터 불노하 강변과 린취안[臨泉, 임천], 난양[南陽, 남양], 이창[宜昌, 의창], 충칭[重慶, 중경] 등을 거쳐 시안에서 장정을 마쳤다.

장정단은 이날 오전 현재 양곡 창고로 사용되는 OSS 훈련장의 운동장을 함께 달리며 특수 훈련을 받았던 장준하와 광복군 국내진공대의 훈련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이준영 사무국장은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버리려 했던 장준하는 중국이 아니라 조국에서 죽을 수 있다는 말에 미군 특수 훈련을 받았다"며 "그가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꿈꾸던 '아름다운 나라'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그는 또 "장준하가 꿈꾸던 나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그 몫은 중국에서 장준하의 길을 따라왔던 우리들이 돌아가서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단은 이날 삼장법사가 창건한 흥교사,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진시황릉, 당 태종과 현종의 별장인 화청지 등을 관람한 뒤 T56 야간열차 편으로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한단[旱單, 한단] 으로 이동했다.

 

 

# 이모저모

●…등불 6기들은 시안 두보진 OSS 훈련장 운동장에서 20여분간 간단한 체조와 구보를 했다. 들불들은 김영상 대원의 몸풀기 지도에 이어 4열 종대로 운동장을 10바퀴 가량을 달렸다. 등불들은 독립군가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르며 구보를 했다.

●…장준하가 OSS 훈련을 받던 중 관람을 했던 흥교사를 찾은 장정단은 신라 왕족 출신인 원측 스님을 기리는 탑과 그 스승인 삼장법사에 대한 이야기 등 절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박한용 연구원과 윤경로 교수로부터 진지하게 들었다. 특히 흥교사의 와불을 모신 절 지붕의 처마 장식에 얽힌 '어처구니' 이야기에는 모두들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했다. 처마 장식은 말을 타고 가는 삼장법사 뒤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뒤를 따르는 것인데, 이 장식을 어처구니라고 부르고, 이것이 없는 것을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다는 것.

●…이날 점심 식사는 시안의 자랑인 만두 요리로 등불들은 모두 20가지의 만두를 맛보았다. 오리 비둘기 호두 등 각종 모양의 만두 형태와 속은 등불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는데, 18가지 만두는 한가지씩 밖에 맛보지 못했다. 일부 대원들은 접시에 만두를 모아 사진을 찍기도 했다.

24일 오후 시안 화청지를 찾은 등불6기 중 김영상 대원과 강대중 대원이 5각씩을 내고 온천수를 체험하고 있다.●…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진시황릉 관람에 앞서 장정단은 활릉의 제작 과정과 역사적 배경, 발견 및 복원 과정을 다룬 영화를 감상. 이 영화는 원형으로 된 커다란 암실에 들어가 벽면을 둘러싼 스크린을 서서 보는 것이었는데, 마치 영화의 장면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장정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던 김주연 대원과 설문석 PD는 이 영화의 촬영 방법을 둘러싸고 잠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당나라 미인 양귀비의 이야기와 장개석의 시안 사변 등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화청지에서 일부 등불들은 5각을 내고 온천수를 직접 체험. 특히 강대중, 김영상 등불은 비누 없이 머리까지 감으며 온천수의 진수를 맛보기도 했다.

●…구국장정 사상 처음으로 한단시를 방문하게 된 장정단이 시안을 떠난 24일 밤 시안 역에 5기 등불인 중국 학생이 환송을 나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눴다. 추이잉(여·24)은 지난 7월 장정에 참여한 최초의 중국인이자 외국인 청년등불로 6기 등불들과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재회를 약속했다.

# 시안에서의 OSS 훈련

# 국내잠입을 기다리며

 

 

# 시안에서의 OSS 훈련

임정의 내무부장 신익희는 장준하 일행을 내무부 산하 '경위대'로 조직하므로써 자신의 청년당의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 이에 대원들 사이에는 분열이 생기게되고 이것에 분개한 대원들은 이것을 규탄하고자 임정을 찾아간다. 그들은 이곳에서 시안의 광복군 참모장 겸 제2지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을 만난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 일행에게 '미군 합작 한국 침투 작전 훈련' 계획을 설명하고, 1945년 4월 29일 30여명의 대원이 시안으로 이동한다. 당시 광복군은 김원봉을 지대장으로하는 제1지대, 이범석을 지대장으로하는 제2지대, 김학철을 지대장으로하는 제3지대로 개편되었는데 주력부대는 제2지대였다.

의 약자인 OSS는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을 위한 예비공작을 맡은 전략 첩보대였다. 장준하 일행은 1945년 5월 1일부터 미육군특전단 전술사관 20여명(나중에 40여명으로 증가)의 지도로 OSS 훈련을 받는다.

장준한 일행은 OSS 훈련 뒤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조선 반도에 투입되어 첩보활동, 정보송신, 유격대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실시하는 것을 주임무로 부여받았다. 특히 미군의 상륙시 국민군을 조직하여 후방교란을 지휘하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이는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장준하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삭발을 하고 『등불』과 『제단』을 제외한 모든 자료를 불사르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돌베개 p.289)

OSS 훈련이 끝난 뒤 장준하 일행은 4-5명씩 모두 8개 반으로 나뉘어 함경도부터 남해에 이르는 한반도 지역에 8월 20일 이전 투입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장준하는 경기도반장을 김준엽은 강원도반장을 맡게되었다.

 

 

# 국내잠입을 기다리며

그러나 국내잠입의 최종명령을 기다리던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면서 국내진입작전은 중단된다. 김구를 비롯한 대원들은 며칠 차이로 대한민국이 연합국의 일원이자 조국독립의 주체가 되지 못한 것을 통탄한다. 미군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승리를 환호했지만, 일본군의 항복을 몇 배는 더 기다렸던 광복군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은 환희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고, 서로 부둥켜안고는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 '왜적이 항복한다'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한국청년들을 국내 잠입시키기로 미 육군성과 약속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 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걱정을 갖게 한다." (백범일지, p.246-247)

이날 김구 주석, 이청천 사령관, 이범석 지대장은 OSS 훈련을 받은 2지대 대원들을 ‘국내정진군’으로 편성하여 신속히 국내진입을 시키기로 결정한다. 미군 측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유지, 좌익세력의 견제 등을 위해 국내 진입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미군 사령부는 '사절단'의 파견 시 동승을 결정했다.

8월 13일 7명의 선발대가 결정되고 다음날 진입이 예정되었다. 그러나 14일이 지나고, 15일에 이르러서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긴급전달이 왔다. 이날 오후 4시 7명의 정진군 대원은 시안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빼앗겼던 조국에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간다는 감격과 새나라 건설의 역군이 된다는 희망으로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깊어도 출동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반도의 위험성을 우려해 짐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령에 의해 대원은 4명으로 조정되었다. 45년 8월 14일 새벽 4시 이범석, 노능서, 장덕기, 장준하와 미군으로 이뤄진 22명의 OSS대원들은 미국군사사절단으로 출국하였다. 그러나 황해바다 상공에서 국내 진입을 눈앞에 두고 「한국진입중지」라는 긴급무전이 왔다. 그 날 일본 동경만을 진입하던 미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비행대에 공격을 받았던 것이었다. 비행기는 오후 4시 반경 여의도가 아닌 시안비행장에 다시 착륙하였다. 몇 일이 흘렀다.

18일 새벽 3시 30분 또 다시 시안을 이륙한 비행기는 황해를 지나 대한민국 상공위를 날다가 오후 2시 18분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드디어 식민지의 아들에서 당당한 자주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고국을 밟은 감격에 젖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동족의 환호가 아니었다. 무장 일본군은 비행기를 포위하였고, 다시 돌아갈 것을 위협했다. 결국 사절단 일행은 복귀를 결정하고 다음날 오후 5시에 시안을 향하여 이륙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