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부터 1949년까지)


시대배경
구분
장준하의 삶
1950 (6월25일) 6·25 전쟁 발발
1951 (1월1일) 중공군 압록강 건너 남진 시작
1951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2 (5월26일) 부산정치 파동
1951 (7월4일) 발췌개헌안 통과
1951 (8월5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19511951191 (이승만/함치영)
1953 (7월27일) 휴전협정조인
1954 (11월29일) 사사오입개헌안 통과선언
1956 (5월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
19511951191 (이승만/장면)
1958 (1월13일) 진보당 사건
1951 (12월24일) 이사보안법 파동



1950
1950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1950 국민사상연구원 기획·서무과장, 사무국장 역임

1952 (9월)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으로 피난수도
1951 부산에서 월간지「思想」발간
1951 (12월)「思想」 12월호(4호)까지 발간 후
1951 재정문제로 중단
1953 (4월) 국민사상연구원을 사직,『思想界』창간
1951 (9월)『思想界』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1951 마감,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서
195 『思想界』 계속 발간
1958 (8월)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1951 글로 함석헌과 함께 연행됨
1959 (2월) 이사보안법파동 관련『思想界』
1951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 비판
1960 (3월15일) 제4대 정·부통령 3·15부정선거
1951 (이승만/이기붕)
1951 (4월19일) 4·19혁명
1951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51 (6월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 국회통과
1951 (8월12일) 제4대 대통령 선거 (윤보선)
1951 (8월19일) 국무총리 장면의원 인준
1961 (5월16일) 5·16군사쿠데타
1951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1951(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
1961 (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1951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로 변경
1962 (3월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1951 (3월24일) 박정희 대통령 권한 대행
1963 (10월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1964 (2월1일) 국회에서 '4대의혹사건' 쟁점화
1951 (6월3일) 한·일회담 반대 데모





1965 (1월8일) 베트남 전쟁에 파병 결정
1965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한·일협정)
1966 (7월9일) 한·미행정협정 (SOFA)











1967 (5월3일) 제6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1951 (6월8일) 제7대 총선 실시
1951 (6월8일) 신민당 6개월간 등원 거부













1968 (1월21일) 서울 무장공비 31명 침입
1968 (4월1일) 향토예비군 창설
1969 (9월14일) 3선개헌안 변칙 처리
1960
1960 (3월) 3·15부정선거 관련『思想界』 권두언
1951 에서 집권당의 횡포를 신랄하게 규탄
1951 (5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1951 피임, 홍보분과위원장 역임



1961 (1월) 국토건설본부(본부장 장면)
1951 기획부장으로 활동




1962 (8월)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賞)
1951 언론·문학부문상 수상

1964 (3월)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1951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70여회의 연설
1951 통해 박정희 정권 비판
1951 (4월)『思想界』긴급증간호
1951「한·일회담의 문제점」 발행
1964 (4월) 박정희 정권의 매국(賣國)외교를 규탄
1965 (7월)『思想界』긴급증간호
1951「신을사조약의 해부」 발행
19551 한·일협정 조인을 정면으로 반대
1966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1951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에서의 연설이 문제가
1951 되어 구속. 연설 내용은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
1951 나라 밀수왕초",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1951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1951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등
1951 (12월) 보석으로 풀려남
1951 다음해(1967년2월)의 공판에서 징역 6월 선고
1967 (1월) 야권의 정치지도자 회담인
1951 '사자회담(四者會談-유진오·윤보선·이범석
1951 ·백낙준)' 주선
1951 (2월) 사자회담의 결과로 형성된 신민당
1951 (당수 유진오, 대통령후보 윤보선)에 동참
1951 (5월7일) 대통령 선거법 제148호 위반으로
1951 또다시 구속. 구속혐의는 "박정희 씨는 국민을
1951 물건 취급,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1951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1951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라 하여 국가원수를
1951 모독.
1951 (6월)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1951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1951 지지로 옥중 당선
1967 (7월1일) 제7대 국회의원으로 4년의 임기 시작
1967 (11월) 국회에 등원하여 의정활동을 시작
1967 (11월) 경제과학분과 위원회와 국방부과 위원회 소속
1968년 (1월1일) 『思想界』발행인직을 부완혁에게 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