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 소개 / 사상계의 발자취 / 다시읽는 사상계
   

통권 44호(1957년 3월)
함석헌「할 말이 있다」
통권 67호(1959년 2월) 백지 권두언
「무엇을 말하랴 -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
통권 46호(1957년 5월) 윤형중
「함석헌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통권 96호(1961년 7월)
함석헌 「5·16을 어떻게 볼까」
통권 47호(1957년 6월) 함석헌
「윤형중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통권 163호(1966년 11월)
백지 권두언「이 난을 메꿀 수 있는 자유를 못가져..
통권 61호(1958년 8월)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통권 205호(1970년 5월) 김지하
「오적(五賊)」

 

통권 44호(1957년 3월)
함석헌 「할 말이 있다」


할말이 있다.

"네가 누구냐?"고 묻는가? 물을 것이다. 이천년전 애급 바빌론의 문명이 오고 가는 세계와 행길에 나타나, 약대털 옷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다." 하는 세례 요한을 보고도 "네가 누구냐?" 했던 인간들이 나보고 묻지 않을 리가 없다. 나야 이 썩어진 속에 한데 묻혀 구데기처럼 우물거리며 그 먹다 남은 것, 입다 남은 것을 얻어 입고 먹지 못하면 못살겠다고나 하는 듯이 있는 나 아닌가? 그 내가 말을 한다면 "네가 어떤 놈이냐?"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참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폭풍처럼 몰아쳤지만, 나야 말한다해도 이 겨울밤에 문틈으로 스며드는 문풍지 소리만이나 할가? 그리고 문풍지 소리가 아무리 낮고 흐리고 썩 쉬어도 그만큼 비위에 거슬려 잠을 잘 수도, 노래를 할 수도, 충덕공론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발 세례 요한이 옵시다! 와서 그때에 맑은 요단강 물을 떠서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실천을 하라." 고 휘 뿌렸던 것 같이 이 걸쭉한 청계천 구적물이라도 떠서 끼여 얹어 줍시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미친년 놈들의 자동차에 뿌려 줍시사!


해방 십여 년에 국민은 점점 못살게 만들면서 정치한다고 문패만 크게 건 국회, 정부, 관청 위에 감옥보다 더 높은 돌담을 쌓아 놓고 고운 말로 꾀여온 가엾은 심령들을 가두어 밤낮 쪽쪽 울리며 겉옷 속옷을 홀딱 다 빼앗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밖으로는 언광 좋게 영혼 구원한다는 종교 성당 위에, 날달마리(벌) 같은 교육자란 것들이 들어 있어서 농촌·어촌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메뚜기 같은 백성들을 보고 출세 시켜주마, 군인 아니 보내 주마, 달래며 귀엽고 착한 어린 것들을 모아다가는 칸칸이 넣어 두고 무언지 알 수 없는 날, 날, 날, 하는 소리를 얼마 동안 하면 그 귀엽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나오는 건 저희와 마찬가지 사나운 잇발에 독한 침, 간사한 소리를 가진 벌 떼 뿐인, 버리집 같이 서 있는 학교 위에, 날아가는 돈 잡는다고 구데기 떼 같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군중들 위에, 그 군중을 또 박차고 먼지를 공중에 날리고 바람 같이 지나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자동차와 그 안에 사람이나 몇 무데기씩 잡아먹었노라는 듯 제치고 앉은 미친 년 놈들 위에, 또 그 모든 것 다 보면서 나라 망하는 줄은 모르고 재미난 구경한다고 극장 앞에 입을 헤벌리고 줄지어 섰는 저 미친 젊은 놈 젊은 년들 위에 제발 그 구적물이라도 끼어 얹어 줍시사!

요한이 아니라도 우리 선생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선생이라도 계셨으면! 남보고는 "그까짓 말 따위 가지고 되느냐?" 하면서 자기로는 "그저 깨우쳐 줘야지!" 하고는 나서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말씀하시던 그가 지금 계시다면 이 꼴을 보고 가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가 그렇게 지성에 타올라 하시는 말을 듣고도 그대로 하지를 않아서 마지막에는 "너희가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 하시고는 그날 밤에 이 땅을 딱 떠나 버리신 그의 그 말을 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가? 또 그것을 본 내가 어떻게 말하지 않을가?

"할 말이 있다." 하는 나보고 "네가 누구냐?" 하는가? 내가 누구임을 말하리라.

나는 세례 요한도 아니요 남강(南岡)도 아니지만 나는 또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이 내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암만 준다 해도 내가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만 두고 부통령만 돼도 백주에 경찰이 죽이려드는데 그것을 한단 말인가?

나는 대통령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꿈을 꾸는 될 번 댁도 아니다. 나는 무슨 높은 벼슬아치도 아니다. 지금 벼슬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은 없이 그저 나라 위해 희생적으로 한다는데, 나는 그런 덕(德)도 없거니와, 제일에, 그들 같이 허공에서 옷, 밥, 자동차를 불러내어 잘 먹고 잘 입고 잘 달리고 노는 요술을 모르니 할 수 없다. 나더러 하라면, 받는 봉급이 없다면 이슬 먹고사는 매미가 아닌 이상은 절도나, 강도나, 살인이나, 강간이나, 사기, 횡령, 공갈, 협박을 하지 않고는 그렇게 사는 재주는 없을 것이다. 그럴 마음이 없으니 그것은 못하는 것이다. 또 그런 것들에 굽실거려 국물을 얻어먹으면 나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나는 벼슬아치 앞잡이도 못한다.

나는 또 무슨 종교의 거룩한 직원도 아니다. 중도, 목사도, 감독도, 신부나 주교도 아니다. 모가지를 열 네 번 잘리면 잘렸지 신부, 목사는 절대 아니 된다. 되면 무엇보다 백주에 아무 것도 없는 껌껌한 방구석에 불을 켜 놓고 거기 절을 해야겠으니 그런 얼빠진 짓이 어디 있으며 낮도깨비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고 또 나도 꼭 같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나 되는 척 하고 선남선녀(善男善女)를 보고 절을 하라 해야 할 터이니 그건 못한다. 속엔 양갈보의 치마보다도 더 얼룩덜룩한 세상을 그리면서 겉으로는 아니 그런 척 검은 예복을 입고 서야겠으니, 그나마도 제 손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불란서, 미국, 영국서 빌어 온 물건,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의 피를 빨고 장사라는 이름으로 도둑질은 하는 손으로 된 것이니 그건 못한다. 철없는 여자 손에서 가락지를 뽑을 뿐 아니라 맘까지 뽑아야지, 있지도 않은 천당지옥 가보기나 한 듯이 있다 하여서 영혼 건져 주마 하는 대신 이 세상에선 개 되지 같은 살림에도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거세(去勢)를 하여 이리 같은 압박자들이 맘놓고 해먹도록 해주는 대신 신교의 자유(信敎自由) (산앙의 자유는 사실 하나님이 양심 위에 주는 수밖에 없는데) 얻어 가지고 실속으로는 제가 세상에서 향락하는 보장을 얻어야겠으니 나는 천당지옥은 아니 믿어도 내 양심에 내리는 하나님 명령이 무서워 그런 짓은 못한다. 만일 지옥이 있다면 이담 차라리 지옥 가는 것이 낫지, 나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민중을 속이고 업신여기고 팔아먹을 수는 없다.

나는 또 교육자도 학자도 아니다. 젊어서 철없어서 학교 선생이라고 해 본 일 있으나 그것 그만둔지 이십 년이요 이제 교사되라면 무섭기만 하다. 될 수 있다면 했으면 좋은 일이나 내가 된다기보다 남이 나를 선생으로 알도록 살아야 할 터이니, 내편에서 누구를 가르쳐 주마 할 수 없고 요새 교육자 되려면 돈 셈 잘 질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 모르지, 학자 되려면 가위질 잘 하고 풀칠 잘 할 줄 알아야지, 또 뼉다구는 쏙 빼고 지렁이 같아야지, 학생보고는 없는 것도 있는 척 엿장수 모양 잘 놀려먹을 줄 알아야지, 그러나 그런 재주 하나 없다. 농촌에선 "아이구 죽겠다!"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문을 굳이 닫고 앉아 아이들보고는 너희 아버지 너의 어머니 피를 어서 뽑아다 내 마실 술을 빚으라 해야겠는데 나는 그건 천성에 맞지를 않아 못한다.

나는 또 예술가도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 없어 못한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원통한 속을 몇 천년을 두고 억눌리고, 짓밟히고, 물리고, 찢기고, 지지우고, 째우고, 하다 하다 못해 허리가 잘린 이 한(恨), 이 아픔, 설움을 한번 하늘 땅이 떠나가게 울었으면 좋겠는데 속에선 타건만 이 목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시(詩)니 그림이니 음악이니 해도 무어냐, 울음 아니냐? 남들은 참 잘 우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몇 천년을 구박 받는 계집종 모양으로 울음답게 울어보지도 못하지 않았나? 인젠 "나도 사람이야요!" 하는 생각은 나건만 왜 울음조차 아니 나올가? 누가 내든지 참 울음 끝을 내기만 하면 곤륜산맥(崑崙山脈)이 저릉저릉을 울리도록 태평양의 물결이 밀려나가 럭키산맥을 잠그도록 삼천만이 따라 울 듯도 싶건만 잠그도록 삼천만이 따라 울 듯도 싶건만 아무도 끝을 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구역나는 쨔즈곡이 날뛰는 길거리엘 나가기도 싫고 상아 의자에 않아 금 촛대에 불켜 놓고 계집종 벌거버껴 춤 취우며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앉았는 격의 부르조아의 몰락해 가는 예술의 찌꺼기를 먹으려 뉘 집 사랑방을 기웃거리기도 싫다.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못되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民)은 민초(民草)라니 풀, 같은 것이다. 나는 풀이다. 들에 가도 있는 풀, 산에 가도 있는 풀, 동양에도 있는 풀, 서양에도 있는 풀, 옛날도 그 풀, 지금도 그 풀, 이담에도 영원히 그 풀일 풀, 어디서나 언제나 다름없는 한 빛깔인 푸른 풀. 나는 사람 중의 풀이지, 아름드리 나무도,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버러지도, 고기도 아니다. 내가 썩어 그 나무가 있고 내가 멕혀 그 노래, 그 노래, 그 깃, 그 날뜀이 있건만, 언제 그렇다는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 그래도 또 멕히고 또 썩는 나지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흙을 먹고살아 남의 밥이 될지언정 누구를 내 밥으로 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의 밑에 깔렸건만 또 아무리 잘나고 아름답고 날고 긴다 하던 놈도 내 거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놈도 없더라. 태평양 저쪽 대평원(大平原) 풀 나라에는 정말 피풀, 풀 사람이 나와 '풀잎' 노래를 읊었건만 이 풀밭에서는 언제 노래가 올라올가?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비어도 비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노래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 이 없이 나는 풀, 너는 조물주(造物主)의 명함 아니냐? 푸른 너를 먹고 소는 흰 젖을 내고, 사람은 붉은 피가 뛰고, 소리도 없는 너를 먹고 꾀꼬리는 노래하고 사자는 부르짖고 썩어진 물에서나 마른 모래밭에서나 다름없는 향기를 너는 뿜어내니 너는 신비의 꽃이 아니냐?

풀, 네 이름을 누가 다 알 수 있느냐? 네 수를 누(數)가 헬 수 있느냐? 빽빽히 서도 다투는 법이 없고 드물게 서도 홀로 차지하는 법이 없고, 나무는 조금만 자라도 그 밑에 누가 살수가 없고 버러지 새끼도 나기만 하면 서로 떼미는데 너는 그런 법이 없지, 함께 나서 함께 자라 함께 썩어 함께 부활(復活)하는 풀, 너는 평화의 왕관 하나님 뭇 아들들의 돗자리. 겸손한 자 땅을 차지한다니 너 두고 한 말 아니냐? 너를 참말 아신 분은 너를 솔로몬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하고 하나님이 너를 기르신다 했건만 그 너를 아는 자가 없구나. 그러나 누른 금도 붉은 구슬도 가지각색의 만물도 다 없어져도 아래서 연푸른 평화와 너와 위에서 검푸른 거룩의 하늘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풀이다. 풀 사람이다. 민중이다.

"나는 민중이다." 한다고 "그럼 네가 할 말이 무슨 말이냐?" 할는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나도 할 말이 있다. 내가 비록 풀 같은 존재나 풀잎에도 맺히는 이슬이 있듯이 내 속에도 맺힌 맘이 있고 그 맘이 비록 하듯 밤 동안 울고나 맺힌 눈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밝은 날을 맞으면 풀려 하늘로 고추 올라가야 할 말씀이 맺힌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할 말이 있으면 아니 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옛사람 말 듣지 못했나? "속에 생각하는 것 말하지 못하면 배가 부르트는 노릇" 이라 하지 않던가?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입으로 옳게 뽑아내면 웃음도 될 수 있고 울음도 될 수 있고 비웃음도 유모어도 하소연도 어거지도 될 수 있어 제 할 일을 하게 되지만 입을 막히여 쏟아내지 못하고 배가 부르트다 터지는 날이면 세상을 된통 결단을 내는 법이다. 그러니 남의 입 더구나 수로 헬 수 없는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자 있다면 참 어리석은 자다. 민중은 참는 것이다. 그러나 참음은 참이다. 가득 차면 큰 일을 저질고야 마는 것이다.

웨 마이다스 왕 이야기 듣지 못했는가? 돈만 아는 그 맘이 아풀로의 음악을 못 알아들은 죄로 귀를 뽑혀 당나귀 귀가 됐다 하지 않던가? 당나귀 귀를 만들어 준 뜻은 너 같이 돈만 알고 옳고 고상한 소리들을 줄 모르는 놈은 당나귀나 일반이다 하는 말이다. 당나귀 귀는 당나귀 수리 밖에 못 알아들을 것인데 당나귀란, 입과 생식기(生殖器)만 큰 물건이다. 그러니 네놈은 먹는 욕심과 성욕의 만족 밖에 모르는 짐승이다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도 부끄러워 그 말이 세상에 나갈가 두려워서 사람 모양을 해야 되겠으므로 한 달에 한 번 머리는 깎지만 이발사보고 절대 나가서 그런 말 말라, 했다가는 죽인다고 위협을 했다. 당나귀 같은 그 맘에도 민중의 입이 무서운 줄은 알았다.

그리하여 그 이발사도 목숨 아까운 생각에 그저 말이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으나 종내 견딜 수가 없어 병이 됐고 하는 수 없이 외딴 들판에 나가 땅구멍을 파고 아무도 못 듣게 가만히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하고야 백였다. 그러니 말이란 그렇게라도 하고야 살지 아니 하고는 못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은 참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렇게 몰래 한 소리가 온 공중에 가득 차 바람만 불면 천하에서 다 알게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 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 아닌가? 이것처럼 깊은 진리를 가르치는 이야기는 없다. 땅 속에 대고라도 했으니 그만 했지 만일 마지막까지 입을 막았다면 폭발이 되어 나라고 무어고 송두리째 없어졌을 것이다. 말을 못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이요, 민중의 입을 틀어막는 자는 당나귀보다 더 어리석은 물건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가? 내가 비록 밟으면 얼마든지 밟히는 풀이지만 내 눈도 본 것이 있고 내 귀도 들은 것이 있다. 나라에 일 없으려거든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할말이 있다!"

지금부터 몇십 년 전 민중을 압박하는 지배계급(支配階級)의 몇 사람이 일본에다 팔아 넘기려 할 때에 감동가(感動歌)란 노래가 방방곡곡에 흘렀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사천 여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이 복락하더니
오늘 날 이 지경 웬일인가요

철사 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 만세 우리 소리에
바다 끓고 산이 동켔네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노래로서 내려가다가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 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만일 다치면
반드시 너를 쏘고 죽는다.

이것이 민중의 소리다. 민중은 그때 보다 자유를 얻었을가? 지금도 여전히 꿈틀 하고 밟혀 죽는 버러지 아닐가? 그러나 그 꿈틀이 무서운 꿈틀이다. 그것은 사나운 겨울 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가치는 민중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온다. 삶은 절대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道)이다. 내가 성명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우리 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無言劇)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만, 있고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 온 민중이다. 사람인 담에야 속이 없으리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고 온 사람들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가?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 천년 역사라면서 민중의 글자가 생긴 것은 겨우 오 백년 전이요, 순수한 민중문학이 없는 민족, 민권(民權)의 발달은 전혀 보지 못한 나라, 그리하여 남들이 민족 혁명을 하고 민족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때에 있어서도 제일 떨어져서 못하고, 위에서 본 감동가 정도를 땅 속에 우는 버러지 같이 조금하다 말고는 그저 식민지로 내려왔다. 같은 동양적인 봉건사회에서 같은 서양 문명의 물결을 받고 일본은 자본주의적인 민족국가로 나서는 것을 우리는 왜 못했을가? 주되는 원인은 다른 것 아니다.

그들은 그래도 도꾸가와[德川] 삼 백년 동안에 민중계급의 발달을 보아서 명치유신을 이룰만한 중간계급(中産階級)이 생겼었는데 우리 민중은 너무도 심한 압박 짜먹음 때문에 그만한 실력을 기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짜먹어 염소가 죽는 날 그 짜먹던 주인도 굶어 죽는 모양으로 특권계급이 민중을 짜먹고 살았지만 너무 짜먹었기 때문에 서민(庶民)이 망하는 날 저희도 망하고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종이 되지 않으면 안됐다. 일찍부터 그 이치를 알았더라면 사십 년의 참혹한 역사는 면했을 뿐 아니라, 민족통일을 완성하여 근대식 나라로 됐을 것이요, 그랬더라면 만주사변이 없었을 것이요, 그랬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이 났다 해도 이 모양은 아니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고 하여간 민중계급이 발달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데 그 발달 못한 원인은 무어냐 하면 민중이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은 울어야 더 설어지는 것이요, 정의(正義)는 내 놓고 부르짖어야 높아 가는 법이다. 숙으러지는 계집종은 점점 더 구박을 받는 것이요, 막다른 골목에 들면 강아지도 돌아서 반항을 하는 법이다. 옛날 병법(兵法)에 갈데 없는 귀신을 몰아치지 말란 것은[궁귀막추(窮鬼莫追)]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나라 민중은 그저 구겨박힘 그저 숙으러짐 한길로만 내려왔다. 아파도 아프단 말도 아니 하고 매만 맞아 왔다. 왜 그렇게 됐나? 민중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대체로 그런 것이지만 우리 나라는 더 심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 아니요, 특히 우리 나라에만 심했던 당파 싸움 때문이다. 판단하는 것이 사람이요, 시비 판단이 한번 맘속에 생긴 담엔 말 아니 하고는 못 견디는 것이 인정인데 정말 땅 구멍에 대고라도 "우리 임금 귀 는 당나귀 귀다." 하고야 마는 것인데 이 민중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속이 얼마나 탓을 것인가? 대륙의 세력에 눌려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요 반도 안에서 세력을 부리는 것으로 아주 금을 긋고 든 특권계급은 생각이 아주 근시적(近視的)으로 고식적(姑息的)으로 되어 첩(妾)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량은 좁을 대로 좁아지고 수단은 혹독할 대로 혹독해졌다. 그리하여 정권을 한번 잡기만 하면 아주 현금주의로 언제까지 해먹을지 모르는 것이니 이때에 짜먹을 수 있는 대로 짜먹는다 하는 방침으로 자기네의 반대당은 철저히 박멸하는 정책을 쓰고 나라가 어찌 되거나 산업이 어찌 되거나 그것은 도무지 눈 속에 있지 않았다. (이 버릇이 오늘도 떨어지지 못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그 틈에 있어 무표정으로 지내기로 했다. 시시비비의 판단이야 없지 않지만 있는 소감을 발표했다가는 언제 판국이 바뀌어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오랜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알기 때문에 구차한 목숨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벙어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 더 꺼림 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점점 더 말을 아니 하고 점점 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이리하여 원인이 결과를 낳고 결과가 또 원인이 되어 세계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무언극의 역사는 엮어졌다. 참혹하지 않은가? 비통하지 않은가? 무언극이라니 생의 가장 적은 벗댐이다. 생명은 가만 못 있는 것, 말을 해야 할 터인데, 하면 죽을 것이므로 하지도 아니 하지도 못하는 것이 무언극이다. 꿈틀거림이다. '죽기 전 한번 움직거림' 이다 이런 음성(陰性)의 역사가 어디 있나?

독자여 그대와 나는 다 이런 음성의 역사에서 같이 나온 존재다. 이 음성의 벗댐이 풍수설(風水說)로 되로 정감록(鄭鑑錄)으로 되고 '간다 노자', '아리랑' 으로 되고 "나라는 우리 나라냐? 너희 나라지. 싸움을 하거나 망하거나 우리게 관계가 없다. 나라는 너 될 대로 돼라 해라, 우리는 우리의 이 구차한 모가지 하나를 안구는 것과 새끼를 치는 것을 단 하나인 일로 삼겠다." 하는 태도로 돼 버리다가 그래도 생명의 명령을 마지막까지 어길 수는 없어서, 그래도 사람이어서 터져 나온 것이 홍경래(洪景來)요. 최제우(崔濟愚)요. 전봉준(全琫準)이었다. 제주도나 6·25 때 주었다 뺏었다가 심했던 지방에 가본 사람은 이 사정을 잘 알 것이다. 그런 지방 사람들은 도무지 무엇을 물어도 댓구를 하지 않는다. 국군 공산군을 너무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시비고 선악이고 다 모르고 무표정이 제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복지구(收復地區)의 정치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그런 어느 한 지방만 보아도 답답한데, 나라 전체가 역사 전체가 그렇게 됐으니 일이 어찌 쉬울가? 정치에 당하는 사람은 민중의 이 심리 사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사육신(死六臣)의 일이나 3·1 운동은 그 역사적 뜻이 참으로 큰 것을 알 수 있고 생각할수록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이 여론 없는 역사에, 공론(公論)없는 사회에 말 못하는 민중에 밟으면 버러지 풀 같이 밟는 대로 밟히는 백성에 글쎄 그런 진탕 속에 음냉한 구렁에, 어쩌면 그런 연꽃 같은, 붙는 불길 같은 혼(魂)이 왔더란 말인가?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떨어졌던가? 하늘이 무심치 않아 특별히 보냈던가? 이 벙어리 민중더러 입을 열라고 입을 열어 중얼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타죽겠으므로.

그렇다 이것은 길고 긴 무언극의 기도가 하늘에 호소되어서 하늘에서 열어 주심으로 내려온 길이다. 그러기에 한글, 한말이 죽을 번하다 살아나지 않았나? 이 좋은 말을 두고 이 아름다운 글을 두고 민중이 왜 말을 아니한단 말이냐? 나는 '할 말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역사에 무슨 잠꼬대라고 언론 취재가 무어냐? 저와 조금 다르면 공상당이라, 비국민이라, 이단이다! 제발 그런 소리를 맙시사! 시대착오(時代錯誤)다. 역사의 거꾸로 감이다. 하늘 명령 거스림이다. 그것으로 망한 우리 나라 아닌가? 제발 이 민중이 할 말을 하게 하라! 마이다쓰야 벌써 죽은 지 가 오래지 않나? 나는 죽어도 말은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임금 귀는 당나귀 귀다!" 어리석을진저, 화 있을진저,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자여! 아이들을 찬송 못하게 하면 길가의 돌이 부르짖을 것이다. 민중이 말못하면 하늘이 직접 말한다. 하늘은 민중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늘이 직접 말을 하게 되는 날엔 큰 일이다.


할 말이 있다.

내가 할 말이 있다니, 그럼 누구보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 무를는지 모른다. 할 말이야 참 많고 할 사람도 많다. 다 하자면 끝이 있을가? '일 다하고 죽은 무덤 없다' 지만 일보다도 말은 더 크고 끝이 없다. 말 다하고 죽은 무덤은 없다. 그래 다하지 못한 말이 다시 무덤 속에서 살아 나오는 것이 인생이요, 역사요, 일이다. 그러니 할 말이 있다면 '할 말 다 못 했다.' 는 말일 것 밖에 없다.

벼슬아치들을 본다면 이솝이야기라도 해 주고 싶으나 그 문간이 너무 사나와 이런 행색으론 갈 수도 없고 우선 문간에서 "나만큼도 못 먹는 꼴에 말이 무슨 말이냐?" 할 것 같아 갈 수 없다. 이솝 얘기란 것은 오리가 금 알 내 먹는 말이다. 아무리 금 알이 탐이 나도 단번엔 아니 되는 것이요. 금 알을 먹고 싶을수록 오리를 살려 두고야 짜먹는단 말이다. 생명의 법칙은 저 좋고 남 좋게[자이이타(自利利他)] 생긴 것이어서 나를 죽이지 않고 남을 죽이는 재주는 없는 법인데 자격이 본래 벼슬아치요, 하늘에선 벌받아 떨어진 것들[천지벌민(天之伐民)] 이기 때문에 그 것을 모른다. 그담 신부, 목사, 대사, 교사, 박사 하는 문화인이라는 유식자 지도자들을 만나면 물을 것, 배울 것, 들을 것, 질문할 것, 그리고 의논할 것이 참 많건만 얼마쯤 가까이 갔다가도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서 그만 두고 말게된다. 그들 보게 되면 바닷가에서 물 다 짠 다음에 쟁변에 있는 조개를 갈아 껍질들을 쓰고 있다. 가까이 가기만 하면 달아 버리기 때문에 속을 알 수 없다.

우리 민중은 딴 속은 없는데. 본래 우리는 위험을 위험대로 겪으면서도 열린 맘으로 역사의 물결에 뛰어들기 때문에 희생을 많이 냈지만 자유로 그 물결을 나고 오대양을 맘대로 갈 수 있는 고기가 될 수 있었는데 그들은 꾀가 있어 껍질을 쓰고 그 옛 집을 지키기로 했으므로 이상하게도 태고시대의 모양 그대로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전통은 놀라운 전통이지만 그들은 진보는 못 할 것이다. 보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소와 같이 어마어마한 뿔이 돋은 가톨릭, 외짝 조개의 전복 같은 신교, 거북 같은 고전주의, 산호 같은 귀족주의, 가지각색이지만 요컨대 껍질을 쓴 점은 마찬가지요 밀물(潮流)에 반대하는 점도 공통이다. 같은 바다에 살면서도 그들은 고생대(古生代)요 우리는 최신세(最新世)다. 무장해제(武裝解除)를 하고 아무리 하나가 되자 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허기는 소라를 인제 껍질을 베끼면 대번에 말라죽을 것이다.

그러니 죽어도 그 제도는 지키려,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물 타고 영원의 바다로 아주 가버린 다음 그들은 한 동안 그 전통을 자랑하다가 그대로 화석이 될 것이다. 이따금 서울 거리를 지나가노라면 일제시대의 벼슬아치 노릇하던 사람, 이북서 지주 노릇하던 사람들이 그 때에 뽐내고 입던 수달피 외투가 노드락 노드락 떨어져 가는 것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는데 이들 전통적인 제도 지키는 사람들 보면 마치 그것 같아 한긋 가엾은 생각이 든다. 아직도 제 주위에 옛날 중성을 해 주는 몇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취미에 그 같은 목숨을 지키겠지만 참 가엾은 일 아닌가?


그러니 할 말 있다면 민중에 대해서다. 민중 중에서도 젊은이를 보고서다. 말은 해야지만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 할 가 염려하라." 제 노릇 할 맘 없고 남에게 대해 개 같은 충성이나 하는 것을 도덕과 신앙으로 아는 자에게는 민중의 도덕 종교는 맞지 않을 것이다. 주어도 발로 밟을 것이다. 하늘 생각 모르고 땅에 붙은 향락만 아는 돼지 같은 인생관을 가진 자는 민중의 자유 평등 정신을 원수 같이 알아 도리어 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자연 우리는 민중에도 젊은 민중에로 향한다. 말이 있다면 있다.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 말이란 들을 수 있으리만큼 가슴이 익어야 한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아홉 해를 말을 하지 않고 돌벽을 향하고 앉았다 하지 않나. 그리하여 혜가(慧可)가 팔을 자르는 것을 보고야 입을 열었다 하지 않나? 말을 들으려면 팔이라도 자를 결심을 해야 한다.

민중의 혜가여, 전통의 줄을 못 놓아 하는 보수주의와 타협하려는 네 팔을 끊어 가지고 오라, 그럼 우리가 말하리라! 그러나 또 젊은 민중이여 참 말은 말로 아니 하는 것임을 알지 않나? 아는 사람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不言, 言者不知)] 말은 말이 아니다. 말은 말(勿)라는 뜻이다. 참 말 되면 말없다. 말을 하면 말썽만 된다. 말썽은 특권계급, 지배자, 보수자, 귀족주의자가 하는 것이지 민중은 말썽 아니한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 저들에겐 말썽 안되던가? 글 한 줄만 써도 포스터 하나만 붙여도.

또 말했다면 벌써 다하지 않았나? 맨첨부터 있는 말이지 새삼스러이 할 것이 없지 않은가? 주는 말은 씨니 밝아서는 아니 준다. 그것을 심어 나게 하고 크게 하는 것은 그대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말하지는 않는다. 『思想界』도 우리의 가슴을 헤칠 곳은 아니다. 우리의 이러한 준비 말을 듣고도 자존심의 손상을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껍질 속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우리 가슴을 주고받으려 저 푸른 들로 나간다. 저 푸른 바다로 나간다!

나가자, 할 말이 있다! 종교인(宗敎人).